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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의 멸종 - 크리스틴 로젠Reviews/비문학 2026. 3. 7. 18:09반응형
인스타그램 계정을 비활성화 한 지 2개월 정도 지난 것 같다. 일상을 기록하고 친구들과 안부를 묻고 매력적인 가게들, 이벤트의 정보를 얻는다는 목적으로 이용을 했지만 포스팅을 할 때마다 남몰래 인정을 바라는 내면의 욕구를 무시할 수는 없었고 그 모습은 꽤나 싫었다. 일도 바쁜데 텅 빈 손으로 스크롤하는 것도 지겨웠다. 생각보다 인스타그램 생각이 나질 않는다. 아마 올해 한 일 중 가장 잘 한 일일 것이다. 작년 오아시스 콘서트를 갔을 때, 그 날은 SNS 를 전혀 하지도 않았다. 그 날 하루를 온전히 내 것으로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날을 온전히 경험했다고 자신한다. 잔디밭에서 바람을 맞으며 대기하던 것, 설레면서 경기장으로 들어가던 것, 무대 앞에서 선 채 1시간을 대기하던 것, 공연 내내 실감나지 않아 어안이 벙벙하던 것까지. 생각했다. 꼭 이렇게 특별한 날만 온전히 가질 필요가 있을까. 매일매일 일상을 경험해도 좋지 않을까. 인스타그램을 그만뒀다. 아마 사진도 덜 찍을 것이고 걸으면서 음악도 덜 들을 것 같다. 나의 지금 여기를 경험해야지.
인상깊은 구절
-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주위의 세상과 어울리는 대신 자신만의 현실을 만들어가고 있다. 이제 현실은 더 이상 합의의 결과가 아니다.
- 이 새로운 세계에서 우리는 개인이 아닌 사용자다.
- 인간의 조건이 아닌 사용자 경험에 집중하면서 우리는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을까? 인간은 몸을 갖고 있고, 자신의 취약성을 인식하며, 매개된 경험과 매개되지 않은 경험 사이를 자주 오가고, 성찰을 위한 시간과 공간을 필요로 하며, 결국 유한하다. 반면 사용자 경험은 실체가 없는 디지털이고, 추적 가능하며, 데이터베이스화되어 있고, 항상 매개자가 있다. 사생활이 보장되지 않고 무한을 약속한다.
- 문제는 기술적 변화가 아니다. 기술적 변화는 언제나 일어나고 있으니까. ... 문제는 우리가 '변화가 개선으로 이어진다'는 가정에 안주하고 있다는 점이다.
- 우리가 세상과 맺는 관계는 직접적인 경험보다는 그에 대한 정보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정보가 경험을 대체하는 현상은 왜 우리가 TV의 요리 프로그램을 즐겨 보면서 정작 먹을 때는 다른 사람이 준비한 간편식을 좋아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준다.
- 경험은 개인 특유의 것이기 때문에 직접 마케팅할 수가 없다. 마케팅할 수 있는 것은 특정 제품에 대한 사람들의 선호다. 비평가 롭 호닝이 지적했듯이 "경험 자체보다 선호가 더 유용해지면... 모든 '경험'이 선호에 대한 사회적 논쟁의 형태를 띠게 된다."
- "자기애가 강한 사람들이 갈망하는 것은 보통의 경험이 아닌 과장된 경험이다. 그들은 경험 속에서 자신을 보여주는 데에만 집중해 개별적인 상호작용이나 장면이 갖는 가치를 충분히 인식하지 못한다." ... "경험은 위험을 극복하는 것이며 '경험 experience'이라는 단어는 '실험 experiment', '전문가 expert', '위험한 perilous'과 어원이 같다"고 했다. 그는 경험은 낯선 곳으로 과감히 나아가고 불확실성과 잠재적인 위험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다른 사람의 위험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는 것은 경험이 아니다.
- 대면 경험, 즉 실제 세계에서의 경험은 불쾌할 수 있다. 지하철에서 냄새나는 남자가 옆에 앉아 있는 경험이 깨달음을 가져다줄 리는 없다. 도덕군자인 척하는 사람이나 그런 경험에도 나름의 가치가 있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물리적인 세계와의 이런 일상적인 만남은 서로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강화한다. 거기에 마음을 열어야 놀라움, 불쾌, 불편 그리고 뜻밖의 상호작용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컴퓨터는 더 이상 찬양하거나 거부해야 할 기술이 아니다.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삶의 현실이다. 컴퓨터의 논리는 현대의 업무 루틴과 사고방식에 완전히 흡수되었다."
- 몽테뉴는 몸이 자신을 이해하는 데 중심이 되는 방법 중 하나라고 믿었다. 몸은 우리의 연약함을 상기시키고 자아의 우월감을 제한한다. 그는 말했다. "세상에서 가장 높은 왕좌에 앉아 있는 사람도 결국 제 엉덩이 위에 앉아 있을 뿐이다."
- 설명되지 않은 기다림은 설명된 기다림보다 실게 느껴지고 불확실한 기다림은 확실한 기다임보다 길게 느껴진다. 디즈니월드의 모든 놀이기구 앞에 대기 시간이 표시되어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 "침묵을 깨뜨리는 것은 말이 아니라 인정받고자 하는 열망이다."
-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든 것은 휴가 자체가 아니라 휴가에 대한 기대였다.
- 몽테뉴는 수세기 전에 이렇게 경고했다. "모든 사람이 다른 곳으로, 미래로 서둘러 움직인다. 아무도 자기 자신에게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서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세상과 사람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파악하려면 시간, 인내, 지루함, 백일몽, 발견에 대한 기대가 필요하다. 이것들이 없다면 우리는 그저 시간을 죽이고 있는 것이다.
- 유능한 세일즈맨이나 정치인은 이미 알고 있듯이, 반복적이고 권위를 이용하고 감정에 호소하는 설득 도구는 언제나 유용했다.
- 새폴스키는 이런 "인위적인 강렬함의 홍수"에 익숙해지면 그보다 강렬하지는 않아도 중요성만은 결코 덜하지 않은 일상적인 경험의 순간, 즉 시인과 소설가가 몇 세기 동안 이야기해온 "순식간에 지나가는 쾌락의 속삼임"을 알아차리는 능력이 약해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 "당신이 있는 곳에 집중해야 한다. 즐거움은 당신 주변의 가시적인 세계에서 얻어야 한다"
- 실리콘밸리의 많은 회사와 마찬가지로 파인더리는 자기실현이라는 얄팍한 미사여구로 돈벌이라는 회사의 목적을 가리고 있다.
- "과거에는 인내가 통제할 힘이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면 지금은 현대 생활의 속도를 통제하는 한 가지 방법으로 여겨진다. 현대의 속도는 우리가 통제하지 않으면 우리를 통제한다. 인내는 더 이상 무력화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제는 인내심이 곧 힘일지도 모른다."
- 예술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요구하지만 오락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우리에게 무언가를 주는 오락을 추구한다. ... 예술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요구해야 한다. 우리 자신의 선호를 제쳐두고 다른 사람의 비전에 따르려는 자발성을 말이다.
- 고프먼은 "개인은 존중을 원하고, 얻을 수 있으며, 그럴 자격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존중을 스스로에게 주는 것은 대체로 불가능하기에 다른 사람에게서 구해야만 한다." 고프먼이 이 글을 쓴 것은 존중이 공적 공간에서 다른 사람으로부터 나온다고 가정할 수 있었던 시대였다. 오늘날 우리는 휴대전화를 통해 수백만 명의 사람들로부터 즉각적인 확인과 인정을 받을 수 있다. 그 결과, 공적 공간에서 낯선 사람들에게서 확인과 인정을 구하려는 유인이 줄어들었다. 그러면서 공적 공간의 사용에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고프먼은 "개인이 원하는 존중을 스스로 얻을 수 있다면 사회는 개인이 고립되어 살면서 자신의 신전에 끊임없이 절을 하는 섬으로 해체될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 리처드 세넷이 지적했듯이 예의는 사실 배려의 한 형태다. 그 목적은 "내가 타인에게 짐이 되지 않도록 타인을 보호하는 것"이다. 세넷이 말했듯이 무례함은 "다른 사람에게 부담을 주는 것이다. ... 자신이 일상에서 겪는 트라우마를 개입해줄 사람이 필요할 떄,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부을 귀가 필요할 때 외에는 다른 사람에게 한 조각의 관심도 없는 이들이 무례한 사람이다."
- 우리가 잃어버린 것을 확인하는 일은 그것을 되찾는 과정의 시작이기도 하다. 실리콘밸리의 주장과는 달리 역사는 항상 진보를 향해 꾸준히 나아가는 것이 아니고, 모든 새로운 것이 기존의 것에 대한 개선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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