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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허송세월 - 김훈
    Reviews/문학 2025. 4. 19. 2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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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 전에, 김정선 작가가 쓴 글에서 김훈 작가에 대한 말을 보았다. 김정선 작가는 원래 교정교열사로, 작가들의 글이 출판되기 전에 글을 살펴보며 맞춤법, 주술 관계 등을 고치는 작업을 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가장 인상적인 문장을 쓰는 작가로 김훈 작가를 뽑았었다.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아직도 기억나는 이유로는 김훈은 접속사를 잘 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접속사 없는 장문의 글. 못 없이 지어진 집처럼 생각되었다. 언젠가는 김훈의 글을 읽고 싶어지는 추천이었다.

    이번 김훈 작가의 <허송세월>을 읽으면서 접속사가 쓰였는지 찾아보며 읽었다. 그런 형식적인 것에 집중하면 사실 읽는다기보다는 탐색에 가까운 일이겠지만 어찌되었든 신경쓰이는 건 사실이었다. 결론적으로 300페이지가 넘는 글에서 고작 두 번 쓰였다. 그 두 번이 한 문단에서 쓰였는데, 그 의도를 나는 알 수 없다. 

    글의 내용은 김훈 작가의 생각 모음이었다. 나보다 훨씬 많은 세월을 살아온 사람이라 관점이 다른 지점이 많았다. 이 책에서 김훈은 어느정도 삶을 돌아보고 정리하는 모습이다. 70대인 사람의 글을 전부 다 이해하기에는 내 삶의 길이가 짧다.

    주어와 동사의 거리를 최대한 좁히고, 형용사와 부사를 조심스레 사용한다는 말이 재밌고 와닿았다. 변수를 사용되는 곳과 가까운 곳에 선언한다는 말과 비슷하게 느껴져 재밌었고, 직업이 개발자인지라 작가의 말을 클린코드라는 렌즈를 빌려 해석하게 되는 내 모습도 재밌었다. 재미뿐만 아니라 저 문장에 한참 머물렀던 이유는 현재 내가 원하는 삶을 은유하는 말이라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멋진, 뛰어난, 책임감 있는, ...' 등 멋진 말들에 나는 휘둘렸다. 정작 내가 하고 싶은 행동과 해야 하는 행동에 닿지 못하거나 늦게 닿았다. 빙빙 돌아 가지 말고 바로 가야 한다. 나는 무언가에 몰입해서 어떤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것을 좋아해서 개발을 직업으로 삼았고, 음악을 취미로 하고 있다. 나는 개발과 음악을 한다. 최대한 나와 내가 좋아하는 행동 사이에 거리를 좁히고 망설이지 말고 바로 나아가자. 주어와 동사로 이루어져 조금은 메마르고 투박해 보이지만 단순하여 오해가 끼어들 수 없고, 그만큼 진실된 문장. 그런 삶을 살아내자.

     

    이 짧고 보잘것 없는 독후감을 쓰면서 김훈을 따라 접속사를 쓰지 않아 보았다. 생각보다 쉽지 않은데, 게임을 하는 것 같아 꽤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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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쪽.

    네가 안 피우면 끊는 거다,라는 이 단순한 말 한마디에 나는 창피했다. 더 이상 들이댈 말이 없었다. 노스님은 고도로 응축된 단순성으로 인간의 아둔함을 까부수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73쪽.

    사람이 울 때, 소리를 삼키고 눈물만 흘리는 억눌린 울음을 '읍'이라 하고, 소리를 내지르며 슬픔의 형식이 드러나는 울음을 '곡'이라 하고, 눈물도 흘리고 소리도 나는 그 중간쯤을 '체'라고 한다는데, 이날 나의 마당에서 울고 간 새의 울음은 이런 어지러운 말을 모두 떠나서 몸 전체를 공명통으로 삼아 소리를 토해 내는 울림이었고, 이런 울림은 모음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어서 자음이 끼어들 자리가 없었다.

     

    82쪽.

    내 옆에 꽃이 피어 있었구나. 이걸 모르고 먼 데를 헛되이 헤매고 있었구나. 살던 세상으로 돌아오길 잘했구나.

     

    131쪽.

    김화영 교수가 프랑스 여행길에 서점에서 책을 골라 와 번역해 준 <걷기 예찬>을 읽으면서, 무릎이 아파 걸을 수 없는 나는 걷기의 육체성과 걷기의 정신성, 걷기의 개별성과 걷기의 개방성, 그리고 그 두 쌍의 대립적 국면들이 서로 만나서 접합되는 대목의 건강함을 생각했다. 이 한 쌍의 대립은 이질적인 것처럼 보이는 두 개의 층위가 사실은 서로 스미고 엉키는 동질성의 다른 측면임을 보여 준다. 그리고 이것은 신비가 아니라, 몸의 생명현상 속에서 이루어지는 과학이다.

     

    133쪽.

    신경준은 길과 걷기의 공적 개방성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길은 소통의 통로이고 걷기는 그 행함이다. "집과 길은 중요함이 같다"는 말은 중요한 말이다. 나의 집에서 너의 집으로 가는 통로가 길이다. 길의 몸과 말의 몸은 다르지 않다. 살아 있는 몸만이 그 통로를 따라 걸어갈 수 있다. 집으로 가는 길과 밖으로 가는 길이 다르지 않다면, 우리는 <걷기 예찬> 속의 길을 따라서 타인에게로 갈 수 있을 것인가. 몸은 그 길을 가고 싶다. 길이여, 책 속에서 뛰쳐나와 세상으로 뻗어라.

     

    135쪽.

    나는 한국어로 문장을 쓸 때 중와 동사의 거리를 되도록이면 가까이 접근시킨다. 주어와 동사가 바짝 붙으면 문장에 물기가 메말라서 뻣뻣해지지만 문장 속에서 판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선명히 알 수 있고, 문장이 지향하는 바가 뚜렷해진다. 주어와 동사의 거리가 멀면 그 사이의 공간에 한바탕의 세상을 차려 놓을 수 있지만 이 공간을 잘 운영하려면 글 쓰는 자의 몸에 조사들이 숨결처럼 붙어 있어야 하고, 동사의 힘이 문장 전체에 고루 뻗쳐 있어야 한다.

     

    143쪽.

    쓰이기를 원하는 것들과 남에게 말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것들이 속에서 부글거리는 날에는 더욱 문장의 고삐를 단단히 틀어쥐어야 한다. 이런 날에는 형용사와 부사가 끼어들고, 등장인물의 말투가 들뜨고 단정적 종결어미가 글 쓰는 자를 제압하려고 덤벼든다. 글이 잘 나가서 원고 매수가 늘어나고 원고료가 많아지는 날이 위험하다. 이런 날 하루의 일을 마치고 공원에 놀러 나가기 전에 글 속에서 뜬 말들을 골라내고 기름기를 걷어 낼 때에는 남이 볼까 무섭다.

     

    147쪽.

    자유, 평등, 해탈, 초월 같은 개념어들이 지향하는 궁극의 상태는 형용사적 세계일 것이다. '가난함'을 '빈곤'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가난을 모른다. 가난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겪는 삶은 빈곤(poverty)이 아니라 가난함(being poor)이고 차별받는 사람이 원하는 세상은 평등(equlity)이 아니고 평등함(being equal)이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아니지만, 해탈한 도인들의 자유는 동사나 명사의 세계가 아니라 중생들은 알 수 없는 어떤 형용사적 세계일 것이다. ... 삶의 한복판에 있는 자들만이 말을 온전히 부릴 수 있는데, 그 자리에 있는 자는 말을 부릴 일이 없을 터이니 말하기는 어렵다. 본래 그러한 것을 입을 벌려서 '그러하다'고 말할 때 나는 말 앞에서 당혹스럽다. 형용사를 탓할 일이 아니라, 자신의 말이 삶에 닿아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한다. 삶을 향해서, 시대와 사물을 향해서, 멀리 빙빙 돌아가지 말고 바로 달려들자. ... 나는 빈곤이 아니라 가난함을 써야 한다. 형용사와 부사를 버리고, 버린 것들을 다시 추려서 거느리고 나는 직진하려 한다.

     

    158쪽.

    세상의 길과 이어지지 않는다면 책 속에 무슨 길이 있겠는가. 나는 김득신의 책과 화적의 밥 사이를 건너가지 못한다. 나는 밤에는 책을 읽지 않는다.

     

    169쪽.

    글을 쓰는 사람들이 사람 사는 일을 정면으로 들이받지 못하고 옆으로 피해서 모호하게 얼버무릴 때 '삶'이라는 편리한 단어를 끌어와 쓰는 꼴을 흔히 보게 되는데, '고향'식당의 '대중식사' 네 글자는 비켜갈 수 없는 삶의 현실을 내 눈앞으로 밀어붙였다.

     

    259쪽.

    강운구의 인물 사진들을 보면서 나는 3인친 문장 쓰기의 어려움을 생각했다. '나'를 주어로 문장을 쓸 때는 정직하기가 어렵고, 수다 떨지 않기가 어려운데, '그'를 주어로 문장을 쓰자면 '나'로부터 '그'로 건너가기가 어렵다. '그는... 어쩌고저쩌고... 했다'라고 써봐야 그렇게 쓰는 자는 결국 '나'인데, '나'는 '그'에 관하여 무엇을 알고 있고 무슨 의미 있는 할 말이 있는가.

     

    264쪽.

    사람은 지나가지만 사람됨은 지나가지 않는다. 짓밟히고 억눌린 시대에도 사람은 사람다운 표정과 체취와 온도를 지니고 있었고 억압에 매몰되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의 그때'를 '사람의 지금'이라고 말해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268쪽.

    두봉 주교는 해답을 제시하지도 않고, 충고를 하지도 않는다. 두봉 주교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고, 함께 걱정하고, 기쁜 소식을 가지고 오는 사람들과 함께 박수 치면서 웃는다. 예고 없이 찾아오는 사람들을 두봉 주교는 날마다 맞아들인다. "사람에게는 자기 사정을 말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 그걸 들어주고, 거기에 공감하고, 함께 기뻐하고, 걱정해 주면 그것으로 위로가 되고 치유가 된다. 면담의 내용에 대해서는 비밀을 지킨다"라고 두봉 주교는 말했다.

     

    283쪽.

    법의 적용과 집행이 법으로서 정당한 것이라 해도, 이로써 인간 세상에 정의가 구현되는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확실치 않다'는 나의 말은 그야말로 확실치 않아서 내가 듣기에도 비겁하다. 이 민망함을 무릅쓰고 말하자면, 확실치 않은 것을 확실하다고 믿을 때, 한쪽 둑을 막으면 다른 쪽 둑이 무너지고, 꿰맨 자리가 계속 터지고, 터진 자리에서 또 다른 문제가 쏟아져 나온다. ... 

    이 불완전성은 세계의 본래 스스로 그러한 운명이다. 억겁의 세월이 흘러도 인간은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정의 혹은 이념의 깃발을 들고 어깨를 거들먹거리며 땅 위를 걸어다니는 자들은 어리석다. 이 세계의 불완전성을 이해하는 것으로 그 불완전성을 해결할 수 없지만 그 불완전성을 깊이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은 세계와 인간을 대하는 마음에서 겸손과 수줍음과 조심스러움을 갖출 수 있다. 겸손과 조심스러움을 상실한 태도가 이 불완전한 세계 위에 지옥을 완성한다. 이 지옥의 이름은 파시즘이다.

     

    287쪽.

    불완전한 세상에는 그 불완전을 살아 내는 불완전한 방법이 있다. 이 방법은 허약하지만 소중하다.

     

    298쪽.

    이루기 어려운 소망이겠지만, 저는 생활을 통과해 나온 사소한 언어로 표현되는 정의가 구현되는 세상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인간과 세계 사이의 직접성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언어는 훨씬 더 작고 단단하게 영글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듣기를 통과해 나오지 않는 말을 듣는 일은 괴롭고, 프레임이 빚어내는 말을 듣는 일은 괴롭고, 프레임을 향해서 말을 해야 하는 일은 괴롭고, 말을 해도 들리지 않으리라는 예감은 괴롭고, 전체와 부분에 대한 성찰이 없는 말을 듣는 일은 괴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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